우리나라에서 전문의가 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예과 2년과 본과 4년이라는 도합 6년간의 의대 학생으로 공부를 마치고 나면 의사국가고시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의사면허를 받게 되고, 이때부터 의사라는 타이틀을 공식적으로 달게 됩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의사면허를 딴 직후에 진료를 시작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대부분 의사는 면허를 취득한 이후에도 수련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먼저 인턴 1년, 레지던트 4년을 보내게 되며, 남자의 경우 군의관 3년도 추가가 되겠네요. 이 시기가 끝나고 나면 특정과의 전문의를 달게 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펠로우라는 분과전문의 과정을 1년 이상씩 보내는 게 현재 가장 일반적인 수련의 과정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합하여 짧게는 12년, 길게는 15년 이상의 수련을 거치고 나면, 아무리 빨라도 30대 중, 후반의 나이가 되어서 일반적으로 환자들이 마주하는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를 보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난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는 중년에 접어든 의사로서, 돌이켜 보면 정말로 길고도 고단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몰랐으니까 지나왔지, 다 알고 있었다면 다시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의 수련 기간이지만, 이러한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환자들이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전부터 교수님들과 선배님들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겪는 처지에서는 수련의 과정이 힘들고 길었던 만큼, 이러한 시간들은 환자들이 양질의 치료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주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의료 현장에서 정신없이 환자를 보고 있다 보면, 처음 의과대학교에 입학하고, 의사면허를 발급받고, 첫 환자를 마주 보면서 느꼈던 마음속 다짐과 각오들이 어느 순간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입학할 때, 환자들이 느끼는 질병뿐만이 아니라, 이 환자가 느끼는 아픔도 같이 치료해 주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 의사면허를 취득하면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할 때 속으로 품었던 마음, 그리고 인턴으로 첫 환자를 채혈하기 위해 인사하던 어색한 순간의 감정 하나하나가 어느 순간 구석에 넣어두고 찾아보지 않는 빛바랜 앨범과 같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의료는 100%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10명을 치료해서 9명을 좋게 만들어 주더라도 1명은 만족할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처음 10명을 치료할때는 9명의 좋은 환자가 남아있지만, 천 명, 만 명을 치료하고 나면 치료되지 못한 백 명, 천 명이 남아있는 게 의사의 숙명입니다. 이러한 한 명 한 명이, 정말로 모든 의사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름 붙이지 못할 감정들로 쌓여서 모이게 됩니다. 생명을 다루는 선생님들을 옆에서 지켜볼 때 보이는, 소위 말하는 괴팍함이 풋풋한 시절부터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 환자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건강함과 별개로 부득이하게 감정적으로도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저 스스로만 하더라도 지난주 사소한 배탈이 나서 진료 보는 중에 문득 외롭고 지치더라고요. 저보다 오래, 더 많이 아파했던 사람들은 오죽할까요. 그래서인지, 그러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매일 수십 명씩 마주 보는 일상에 노출된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감정에 전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담당 의사로서, 치료의 긴 과정을 거쳐서 나아지고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받고 고마움을 느끼고 더욱 힘을 내게 됩니다만, 그렇지 않은 반대의 경우에는 진료를 보는 의사들도 그 감정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아픈 감정에 매일같이 노출되다 보니 진료실에 있는 의사들 자신도 정서적으로 아픈 그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완전히 분리해 기계적으로 대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환자와 의사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진료실 밖에서 즐거움을 주는 삶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취미가 될 수 있고, 사람과의 관계가 될 수 있고, 신앙이나 사색이 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방법은, 진료를 시작하기 전에 매일 아침 세수하듯 반복해서 스스로 10분가량 짧게나마 가지는 사색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마음을 다해서 저의 치료 실력과 별개로, 저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하게 됩니다.
환자를 낫게 하고 나서도 환자들에게 나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환자가 안타깝게도 낫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실력이 뛰어나서 환자를 잘 낫게 하는 의사가 되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의사의 사명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저에게 치료를 믿고 맡기는 환자라면, 그 환자에게 '마음'을 다 한다는 것이 점차 간과되고 있다는 아쉬움은 갈수록 커지는 듯합니다. 의사로서도 환자에게 마음을 다할 수 있다면, 그리고 환자도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쉽진 않더라도 의사에 대해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다면, 우리 주변에서 아파서 힘들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신 속에서 괴로워하는 환자와 의사의 미스매치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하게 됩니다. 매일 매일 밭에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제 자리에서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읽게 되는 모든 환자와 의사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