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야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장 - “한약은 유용한 과학적 자산, 한약자원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나아갈 것”
과학화와 표준화, 첨단기술과의 융합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대한민국 한방산업
최근 K-문화의 세계적 인기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명언을 체험하고 있는 요즘이다. 한약은 동아시아 지역 공통의 전통문화 바탕 위에, 우리나라의 환경·지리·역사적 특성에 맞추어 독창적으로 발전된 약물 지식이다.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는 ▲한약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한약재로 인한 약화사고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며, ▲한약의 품질은 높이고, ▲새로운 의약자원을 발굴해서 국내 산업에 기여, ▲외국에 전통약물 관련 기술을 전수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약자원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연구조직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 최고야 센터장을 만나본다.
안녕하세요, 센터장님. 독자들에게 인사와 더불어서 센터장님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장 최고야입니다. 저는 본초학을 전공한 한의사로, 한약재 감별을 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석대학교에서 석사과정 2년 동안 학사조교로 근무했고, 이후 2007년에 전문연구요원 병역특례로 KIOM에 입사했는데요, 복무만료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지금까지 연구원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생약학회 부회장, 대한본초학회 교육이사, 한약정보연구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고, 식약처 중앙약사심의위원, 한약재 관능검사 전문가, 국가표준 한의약 전문위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한의학연구원 한약자원연구센터의 소개와 주요 사업 내용을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희 센터는 과학기술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지역조직으로 2018년 11월에 개소했습니다. 한약자원 발굴부터 유효성 검증, 산업화 소재 개발까지 한약자원 전주기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저희 센터의 임무입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과제는 ‘한약자원 미래가치 혁신기술 개발’인데요, 한약자원 다양성 확보, 유전자 감별기술 개발, 조직배양을 이용한 표준약재 생산, 가공 공정 현대화, 유효성 검증을 위한 세포·동물실험, AI를 접목한 성분 분석 등 다양한 연구분야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30여 명의 구성원 중 한의사는 저를 포함해 두 명뿐이고, 수의사·한약사를 포함해 식물학·화학·약학·농학 등 여러 전공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 센터는 2021년에 국가생명연구자원 천연물 클러스터 거점은행으로 선정된 것을 비롯해, 국가참조표준 한약자원특성 데이터센터, 산림생명자원 약용식물 보존관리기관 등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센터장님께서는 본초학 분야에서 최고의 연구자로 알고 있습니다. 본초학은 무엇인지 이를 표준화·과학화할 때 어떤 가치가 창출되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과분한 평가입니다. 공공부문에서는 제가 유일하게 본초학을 전담하고 있어서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대학이나 의료기관에는 훨씬 뛰어난 전문가들이 많이 계십니다.
본초학은 한약의 재료가 되는 한약재, 그 한약재의 기원이 되는 식물·동물·광물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한약학, 생약학, 한약자원학, 약용식물학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한약에 대한 국민의 가장 큰 요구가 과학화와 표준화인데요, 이 약이 과연 기대하는 약효를 낼 수 있으며 복용해도 안전한지를 검증하는 것이 과학화, 이 한의원에서 받은 약과 저 약국에서 받은 약의 약효가 동등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표준화라 하겠습니다. 한약은 수백 가지 성분의 복합물이라서, 어떤 성분이 체내에서 어떻게 작용해서 약효를 보이는지 찾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한약재는 생물에서 유래한 것이고, 생물은 개체마다 제각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약효를 표준화하는 일은 더욱 힘듭니다. 그래서 공공부문의 투자로 연구를 꾸준히 지원하지 않으면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합니다.
최근 센터장님께서 연구 중이거나 관심 있는 한약재 연구 분야는 무엇인가요?
생물분류학과 본초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한약은 근대 이전의 고전의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요, 인삼처럼 오랜 세월 명맥이 이어진 약재는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인삼이 지금 생산되는 인삼과 동일한 종류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약재는 학자들 간에 이 종이 맞는지 저 종이 맞는지 이견이 분분하기도 합니다. 문헌을 기록한 시점, 지리적 위치와 현재의 생물 분포 범위, 당시와 지금의 언어 차이, 과거와 현대의 약물 무역 경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고전의 약재가 어떤 생물종을 가리키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물의 학명이나 분류군으로서의 지위도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분류학·명명학 연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같은 종이었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고요. 그런데 한약재는 약전이라는 법규에 규정되어 있고, 법규는 쉽게 고칠 수 없는 것이라서, 현재 생물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학명이 약전에는 그대로 남아있는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약재의 정확한 기원이 무엇인지, 어떤 이름을 써야 하는지가 중요한 연구주제입니다.
한의학연구원에서 한약 기반 우울증 치료제, 알츠하이머 치료물질 개발 등 사회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연구성과가 있었습니다. 한의학 치료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연구원과 센터에서 어떤 노력과 역할을 해왔나요?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을 통해 천연물의 유효성을 밝히는 것은 저희뿐 아니라 전세계 수많은 연구기관과 대학에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희 연구원의 중요한 역할은 고전의서에 기록된 한약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동의보감에 ‘종기에 쓴다’고 기록된 약재가 있으면 실제로 염증 억제 효과가 있는지 세포·동물실험으로 확인합니다. 흥미롭게도 많은 경우 고전 기록이 현대 실험으로도 뒷받침됩니다. 다만 이런 연구는 신규성을 인정받지 못해 특허 등록이 어려워 직접적인 보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전의 효능을 입증하는 연구와 동시에, 새로운 효능을 발굴하는 연구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놀란 것을 진정시킨다’는 기록에서 착안해 퇴행성 뇌질환 치료 소재를 발굴한 것입니다.
최근 유럽 최고 박물관인 프랑스 몽펠리에대학교 약학대학 의약박물관(Droguier)에 ‘한국 한약 섹션’이 신규 개설된 의미가 궁금합니다.
유럽에도 우리의 한약과 비슷한 허브요법이 전통의료로 남아있습니다. 가벼운 감기나 소화불량, 변비, 불면증 등에 허브요법 제품을 사용하는 것이 일상적이고, 유럽 의사들은 가벼운 질환에는 화학약물을 처방해주지 않고 허브요법 제품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한의약 세계화의 한 축으로 각국의 전통의료 부문과 협력이 필수적인데요, 아직 유럽과는 심도 있는 교류가 없었습니다. 최근 대구한의대학교를 중심으로 프랑스에 한의약 진출이 추진되고 있어서, 저희 센터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몽펠리에대 의약박물관에 한국 한약 섹션 개설이 이루어져, 저희 센터에서 수집·검증한 국산 한약재 표본을 전시하게 됐습니다. 몽펠리에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모교로, 1600년대에 의약박물관이 설립될 정도로 유서깊은 대학입니다. 이 의약박물관은 프랑스 역사기념물이기도 하면서 현재도 생약학 강의실로 이용되고 있어서, 여기에 우리나라 한약재를 상설전시하는 것이 한-유럽 전통약물 교류의 상징적 의미가 되리라 기대합니다.
한약자원 연구의 지원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어떤 부분이 필요할지 센터장님의 개인적인 의견(정책제언)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직접적으로는 당연히 연구비, 연구인력, 연구시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물론 현재 한약 시장규모가 크지 않으니, 막대한 투자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2015년 중국 최초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투유유의 수상 업적이 고전의서인 주후비급방의 기록에서 착안한 말라리아치료제 개발이었음을 감안하면, 투자 가치는 충분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동의보감의 한 줄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거시적인 희망사항으로는, 우리나라 국민보건의료 시스템에서 한-양방 통합의학이 지금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본에서는 의사의 70% 이상이 환자에게 한방제제를 투여하고, 중국에서는 전체 의약품 생산액의 절반을 중약제제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한약제제는 국내 전체 의약품 생산액의 5%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므로, 제도 변화 여하에 따라 폭발적인 성장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연구자로서 걸어오시면서 원동력이 되어준 철학이나 신념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억지로 하려면 되던 일도 안 된다’는 게 제 수칙입니다. 어쩌다 공부 좀 해볼까 하고 책상에 앉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나타나서 얼른 공부하라고 채근하면, 하려던 마음도 쏙 들어가는 게 사람 본성이죠. 게다가 세상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역사적 연구성과들 상당수가 우연히, 또는 실수로 발견됐습니다. 연구계획을 연월일 단위로 정밀하게 세우기보다는, 임무에 맡는 큰 방향만 잡아두고 그 안에서 각자가 하고싶은 연구를 자유롭게 하게 두는 것이 낫습니다.
앞으로도 센터장이자 연구자로서 다양한 활동이 기대됩니다. 센터장님의 개인적인 목표나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공진단에 들어가는 사향, 우황청심원의 핵심 재료인 우황을 대체할 수 있는 비동물성 약재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사향은 세계적 멸종위기 동물인 사향노루 수컷의 페로몬인데요, 우리나라에는 사향노루가 DMZ에 30마리 정도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멸종위기 동식물의 국제 거래 협약(CITES)에 따라 국내 유통되는 사향은 전량 러시아산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산 사향은 야생 사향노루를 수렵하여, 한 마리를 죽여서 겨우 20~30그램을 얻습니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 포수가 전선에 징집되는 통에 그나마도 유통 물량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한편 우황은 소의 쓸개에 생기는 담석인데요, 사료를 먹이고 송아지 시절만 갓 벗어나면 도축해버리는 현대 축산업에서는 소에 담석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남미나 중앙아시아 등 대규모 방목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도축 과정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우황이 수입됩니다. 이렇게 사향이나 우황은 공급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격이 금만큼 비싸기도 하거니와, 동물윤리 측면에서도 비정합니다.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고, 약재가 비싸서 쓸 수 없는 상황을 해소하고, 외화 낭비를 줄이기 위해, 사향이나 우황을 화학적·생물학적으로 합성하거나 배양한 대체물질을 개발해야 합니다. 미생물에 사향·우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유전자를 삽입하여 시험관에서 생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한약자원연구센터의 앞으로의 비전과 사업 계획은 무엇인가요?
한약자원의 과학화와 표준화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연구조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저희 센터의 비전입니다. 누구나 한약을 믿고 쓸 수 있도록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한약재로 인한 약화사고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한약의 품질은 높이면서 소비되는 에너지는 줄이고, 새로운 의약자원을 발굴해서 국내 산업에 기여하고, 외국에 전통약물 관련 기술을 전수하는 것까지 저희가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이번 한방산업 기획을 통해 국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한약은 단순히 옛 전통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활용 가능한 과학적 자산입니다. 우리 한약에 대해 불안감을 갖기보다는, 문화적 자부심과 미래 산업의 잠재력을 함께 보아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