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소리 살려내 다시 천 년을 공명하다
천 년의 소리 살려내 다시 천 년을 공명하다
  • 박성래
  • 승인 2015.06.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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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식 주철장
원광식 주철장

 

최근 굽은 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는 말의 뜻이 재해석되고 있다. 본래 쓸 만한 나무는 재목이 되어 베어나가거나 팔려나가지만 굽은 나무는 아무도 베지 않아 거기 그대로 남아 있다는 데서 온 말이지만, 현재 야산에서 자생하는 비틀어지고 기형적으로 생긴 나무일수록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세찬 바람과 뜨거운 햇빛을 온 몸을 다해 견뎌냈을지라도 세월의 무게를 오롯이 간직한 굽은 나무일수록 베여지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자신을 뽐낸다. 사람도 나무와 같지 않을까. 눈앞의 시련으로 인해 여러 자리를 옮긴이와 목표를 향해 한 길을 걸어온 이의 현재는 다를 터. 지금껏 한 자리에서 천년의 소리를 재현해 다시 천년을 잇는 주철장, 원광식 씨의 삶이 이와 같다.

 

69년 쇳물 튀어 한쪽 눈 잃었지만 손 놓지 않아

세월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체구를 감싼 수수한 옷차림, 쇳내 나는 칼칼한 목소리와 안경너머로 뿜어내는 고집스러운 눈빛. 기자가 본 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원광식 주철장(鑄鐵匠)의 첫 모습니다. 세상 물욕의 가지를 달라낸 듯 보이는 그에게 욕심이 있다면 자신을 단단히 하고, 보다 나은 범종 제작을 위한 몰입뿐이다.

“57년 전 종을 위해 한쪽 눈을 바쳤어. 남은 한 쪽의 눈과 목숨을 넣어서라도 조상이 남긴 우리의 소리 유산을 제대로 복원하고, 이 시대에 맞는 작품에 대한 열정을 끝까지 불태우고 싶어. 혼을 담아야 천년의 소리가 나오는 거지.”

그가 처음 종을 만진 것은 지금부터 54년 전의 일이다. 자동차 정비기술을 배우겠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을 때, 그의 나이 17살에 불과했다. 이후 8촌 형의 권유로 종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당시 성종사(聖鐘社)의 대표였던 8촌 형은, 항상 그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줄 것을 부탁하고는 했다. 기술을 익히는 틈틈이 공장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처리하면서 사서 고생을 각오하고 고스란히 감내했다. 때 마침 사찰과 교회 수가 급증하면서 숨 돌릴 틈 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젊은 날을 불태우던 중, 불의의 사고가 그를 덮치기 전까지 말이다. 그는 100(375kg)짜리 종을 제작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구슬땀 흘리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1,200도가 넘는 쇳물이 폭발하면서 눈에 튀었고, 이 일로 오른쪽 눈은 세상을 비춰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방황도 고작 1년에 불과했다. 종이 다시 그를 택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눈을 잃고 나니 세상이 너무 허무하더라고. 종 만드는 일을 접고 농사를 지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을 마치고 베개에 머리를 대면 종소리가 이 귀가 아닌 가슴으로, 머리로 전해졌어. 결국 그 소리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은 셈이지.”

원광식 주철장
원광식 주철장

 

이후 작은 주물공장을 운영하던 그에게 예산 수덕사 범종 제작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그는 1972년 당시 수덕사 주지였던 원담스님(1926~2008)을 찾아가 노임은 필요 없으니 재료만 구입해주면 제대로 된 종을 만들어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승낙을 얻어냈다. 완벽한 종을 구현하기 위해 행자 아닌 행자 생활도 마다하지 않고, 종에 심취한지 1년의 세월이 흘렀다. 각고의 노력 끝에 광복 후 국내 최대 규모의 범종이 완성되고 그의 첫 불사는 성공적으로 회양 한다. 이후 8촌 형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성종사 2대 대표를 맡으며 이듬해 범어사의 종을 완성한다. 당시 범어사 고암스님은 범산(梵山)이란 호를 내렸고, 조계사, 용주사 등 전국 교구본사 중 18 곳의 범종이 그의 손을 거쳤다. 종 하나가 완성할 때마다 그와 성종사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종소리가 삼십 리 간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으며 제작의뢰가 줄을 이었지만 남모를 아쉬움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천년의 종소리를 재현해내겠다는 열망에 빠진 것이다.

 

밀랍주조기법개발로 수 천점 제작·복원한 독보적 장인

언젠가 일본의 절을 방문했을 때 일제가 빼앗아 간 신라 종들을 보물처럼 여기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 일본도 인정하는 1천 년 전 장인들을 나는 잊고 지냈던 거지. 그 때 일본에 있는 신라 종들을 실리콘으로 복제해 왔어. 그 뒤 1300여년 된 성덕대왕 신종의 소리를 들어 보니 내 재주가 너무 초라했어. 신라, 고려의 종을 복원하기로 결심하고 80년대 후반부터 연구를 시작했지. 마지막 꿈은 성덕대왕 신종(에밀래종)이야.”

1976한종범종연구회를 발족한 것이 소리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원광식 씨의 첫 걸음이다. 그는 소리의 비밀을 풀기 위해 크고 작은 모양의 종들을 수없이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학자들은 완벽한 소리에 필요한 종의 구성성분과 두께, 문양의 위치, 모양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데이터를 구축해갔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사라진 선조들의 밀랍주조기법을 복원하는 것이 핵심이었지만 막막했다. 이미 맥이 끊겨 국내 어떤 문헌과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던 기술이었기에 중국이나 일본사찰까지 찾아다녔지만 허사였다. 단지 밀랍주조라는 단어 하나에 매달려 밀랍과 기름을 배합해 만든 초로 모형과 문형을 제작하면서 수백 번 만들다 깨기를 반복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게 예술이란 생각에 실패도 두렵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선조들의 소리를 찾기 위한 그의 간절함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그는 한 박물관에서 우연히 동경(銅鏡)으로 만든 흙 틀을 보고 아차싶었다. 곧 신라의 수도인 경주 일대를 샅샅이 뒤져 곱게 빻은 이암(泥岩) 가루에 전분 등을 섞어 만든 틀로 묵직하면서 청아한 소리의 신라 범종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000년이 가도 깨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의 종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성덕대왕 신종 에밀레~’ 소리 재현이 남은 과업

대한민국 범종의 70%를 출산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원광식 주철장. 다섯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수많은 종 가운데 어느 종소리가 가장 마음에 드는지 우문을 던졌다. “모두 아름답게 들린다가 현답일 줄 알았는데, 국내 유일의 범종 인간문화재(112)의 대답은 의외였다.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뒤 어렵게 꺼낸 그의 말은 애착이 가는 소리나 마음에 드는 소리는 없어. 아직도 수수께끼를 풀고 있으니까이다.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50여 년의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말이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게 느껴진다. 종이 놓일 위치와 환경에 따라 곡선과 장식, 부처님의 진리가 다르고 만족하는 순간, 더 이상 발전이 없다는 것이 종을 대하는 그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집념은 국내 최대 범종인 세계 평화의 종(1만관)과 대만 최대 범종인 명선사종(8,800)을 비롯해, 8,000여구에 달하는 국내외 주요 사암 및 지자체의 범종을 제작하며 성종사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범종제작사로 자리매김하는데 자양분이 됐다. 현재 성종사는 6천여 평의 부지 위에 50톤이 넘는 종을 제작할 수 있는 최신 용해설비와 주조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범종 제작 기술은 보신각종을 새로 만들던 1985년보다 한층 나아져 거대한 범종의 일부를 따로 따로 조각해 전체를 맞춰나가는 기술로 특허도 냈다. 더불어 종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바탕으로 충북 진천에는 종 박물관이 세워졌고, 그가 기증한 수많은 범종은 아름다운 화음을 내고 있다. 그는 남은 시간동안 수 백 년이 넘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점차 제 소리를 잃어가는 신라, 고려의 범종을 복원할 계획이다. 그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옛 종이 300여개가 있지만 모두 깨져서 소리를 내지 못해. 방치돼 있는 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전에 형태와 모양을 되살려 후대에 전해야지라며 우리의 소리 문화를 찾고 명맥을 이어가기 위한 작업에 관계기관과 정부의 지원을 거듭 주문했다.

원광식 주철장
원광식 주철장

 

평생을 종과 함께 걸어왔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런데 예전 같지 않은 체력도 문제고, 젊은 사람들은 작업장 근처에 오려고 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렵사리 기술을 전수해 놓으면 따로 사업을 차리는 게 부지기수지. 다행인 것은 1천 년 전 장인의 지혜를 배우는 과정의 데이터를 기록으로 남겼고, 내 아들이 뒤를 잇는다는 거야. 100, 200년이 넘게 우리 전통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여기에 있어.”

그의 말대로 긴키대(近畿大)에서 금속공학을 공부한 원천수 이사는 종 연구에만 매달려 정작 경영에는 서툴렀던 아버지를 대신해 경영 일선에 나섰고, 내실을 다진 뒤 해외 시장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최근에는 대만의 명선사의 주문을 받아 순수 전통 기술로 대만 최대 규모의 33t 범종을 제작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닦아 놓은 전통 범종 제조기술을 잇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최고의 종 제작사로 거듭난다는 것이 그의 포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도 가업의 중요성을 가르친다고 하니 소리의 수수께끼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원 씨의 걱정은 한시름 덜은 듯하다.

6월 모두가 기대한 원광식 씨의 종이 제작된다. 매 순간 일생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여기며 혼신의 힘들 다해 만든 그의 종이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을 때, 뜨겁게 달궈진 청동의 기운을 머금고 우리 귀와 가슴속에 은은한 울림을 주길 기대해 본다. 주철장의 소명을 바탕으로 누구도 쉽게 발을 들여놓지 않는 이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굽은 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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