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라는 단어는 무게감이 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은 두려움이 있지만 뒤를 따르는 이들이 있기에 보람도 크다. 경기도미술관 최은주 관장이 그렇다. 큐레이터 직업이 생소한 시절엔 첫 주자로 나서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으며 국민의 마음을 휘갈긴 세월호 참사를 예술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강한 행동력을 보여 미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냈다. 큐레이터로 살아온 최은주 관장의 30년 인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정치와 사회 혼란에 영향을 받는 미술이 대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세월호 참사를 품에 안고 정신적 괴로움을 예술로 승화시키다
최 관장이 월간 인물과 인터뷰를 하면서 자주 언급한 단어는 ‘미술관의 역할’이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국립현대미술관의 현대미술 분야 큐레이터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에 대학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대학원에서는 전시기획 프로세스와 의미를 살펴보는 석사 논문을 썼다. 지도교수는 그가 당시 국내에 생소한 큐레이터의 첫 삽을 잘 뜰 수 있겠다고 생각해 국립현대미술관 정보를 전했다. 1989년 5월에 시험을 봐서 합격한 그는 6월부터 정식 큐레이터가 됐다.
“내년이면 큐레이터가 된 지 만 30년이 되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덕수궁미술관장을 거쳐 2015년 경기도미술관의 관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2014년 믿을 수 없는 세월호 참사가 터지고 1년 후 단원고등학교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공 미술기관인 이곳에 왔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흉흉한 사회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치달았고 예술계에는 블랙리스트 소문이 떠돌았으며 경기도미술관은 보이지 않지만 여러 시선에 의해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국내 현대미술 큐레이터 1세대였고 경력이 풍부한 그도 이러한 분위기를 처음 접해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미술관의 역할. 미술관이 온몸으로 사회를 껴안아야 한다는 당위성. 그는 그저 그것만 바라보면 되는 큐레이터였다. 부임한 이듬해인 2016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추모하는 전시회 ‘사월의 동행’을 개최했다. 양심이 있는 예술인을 깨웠고 아픔을 어떻게 내뱉을지 몰라 가슴만 쳤던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국민을 껴안았다. 그는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전시회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개인이나 기관, 단체 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전시회여서 더 반응이 뜨거웠다”라고 회상했다. 130개가 넘는 미디어가 몰렸고 알자지라는 심층 보도했다. 경기도미술관은 공공 미술관으로 본분을 잊지 않고 미술관의 역할에 대한 재인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경기도미술관은 사회 이슈를 바라보는 시각과 전시회 주제를 심화시키는 역량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대성을 말하는 청년 예술가들과 동행하다
‘사월의 동행’ 전시회가 대내외적인 악재 속에서도 성공을 거두자 경기도미술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경기도미술관은 ‘실험적 주제를 잘 끄집어내는 미술관’이라는 명성을 회복하면서 예술가와 시민들에게 다가갔다. 지난 2015년부터 경기문화재단의 창작 지원 프로그램 ‘생생화화’에 선정된 40~60대 중견 작가 10여 명의 실험정신을 담은 전시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미술관은 작가들의 공통된 의식을 찾아 전시회 주제를 정했다. 2015년에는 시간성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 ‘시간수집자’, 2016년에는 19세기 유럽의 산책자 개념을 빌린 ‘산책자의 시선’, 지난해는 우리 사회 이면의 진실에 접근하는 예술가의 시각을 공개한 ‘이면탐구자’가 주제였다. 내로라하는 비평가 한 사람이 한 두 명의 작가와 함께하는 비평프로그램도 병행해 한국 현대미술의 시각을 잘 표현해내는 전시로 정착했으며 올해 12월에 다시 찾아온다.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당대성입니다. 전시회 기획자들은 당대성에 주목하면서 지금도 꿈틀거리면서 시각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청년 작가에 집중하고 그들을 통해 현대미술의 지향성, 실험성, 미래성 같은 것들을 보게 되죠. 한국의 청년 작가들은 미디어 아트 영역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IT기술로 창의적 작업 창출에 능한 그들과 함께 미술관은 관람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프레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경기도미술관의 본분이니까요.”
경기도미술관은 지난 2015년부터 경기창작센터와 ‘퀀텀점프전을 개최하고 있다.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한 작가들 중 일부를 엄선해 작은 개인 전시회를 릴레이 형식으로 연다. 올해는 지난 7월 ‘김재민이–사슴은 뭘 먹고 사나요?’를 시작으로 8월 2일부터 9월 2일까지 ‘홍장오–우주 정경’, 9월 11일부터 10월 7일까지 ‘이지연–순환 규칙’, 10월 16일부터 11월 11일까지 ‘강주리–뒤틀린 자연’ 전시회가 찾아간다. 거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전시기획력을 통해 공공 미술관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후배들과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성공한 비결을 묻는다. 그는 “사심과 관계성을 배제하고 엄정하고 맑은 눈으로 전시를 기획하는 것과 퍼내도 마르지 않은 창의력이 샘솟는 샘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미술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천진난만하게 일했다. 경제 성장 다음으로 정신을 충실하게 가꾸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미술 영역이 시민의식을 가꾸며 꽃피는 그날을 기다리며 작가와 작품을 연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