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파고든 연구, 뇌 질환 정복의 단서 제시
‘기억’ 파고든 연구, 뇌 질환 정복의 단서 제시
  • 남윤실 기자
  • 승인 2018.07.2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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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하나의 건물에 비유한다면 기초과학은 그 건물을 이루는 뼈대라 할 수 있다. 건물을 보다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골조에서부터 탄탄히 쌓아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오랜 시간 기억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수행해온 한진희 교수의 연구는 ‘2018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과제에 선정되며 보다 짜임새 있는 기반을 만들게 되었다.

KAIST 생명과학과 한진희 교수
KAIST 생명과학과 한진희 교수

 

2018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기초과학분야 선정

삼성이 지원하는 ‘2018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상반기 지원과제는 누구나 걸릴 수 있지만 치료가 쉽지 않아 난치성 질환으로 불리던 질병에 대한 연구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다. 기초과학 분야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 등 치료제 개발에 난항을 겪고 있던 질환에 대한 연구가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현재까지 노화, 사고 등으로 인해 손상된 뇌 조직은 해당 부분의 신경세포가 파괴되어 기억이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간 기억과 뇌 조직의 상관관계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온 한진희 교수는 이러한 통념에 반기를 들었다. 생쥐 실험을 통해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기억은 유동적으로 재배치되는 현상을 증명해낸 것이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기억 자리 재배치 현상이라 명명했다. 이 원리를 활용하면 뇌 세포 소멸에 의해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환자들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를 모은다. 그는 하나의 주제를 꾸준히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이번 선정을 통해 한 주제를 가지고 오랜 시간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기초과학의 특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뇌는 몸에 있는 다른 신체 조직과 마찬가지로 세포들로 구성된 조직입니다. 다만 그 수가 엄청나게 많고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죠. 이전 연구에서는 뇌에서 기억이 어떤 세포에 저장되어 있는지를 찾았다면, 이번 연구는 당시의 발견을 토대로 저장 원리와 이러한 특징이 치매 등 기억과 관련한 뇌 질환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규명하고자 합니다.”

특히 기억이 같은 뇌 위치에 저장되지 않고 유동성이 있다는 획기적인 사실은 기억 흔적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학문적 의미와 더불어, 뇌 세포가 계속 소멸되어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치매환자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잠재적 가치가 크다. 기억 장애를 막기 위한 방법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사회경제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한 교수는 나아가 치매를 예방하거나 이를 치료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을 찾는 것이 이번 연구의 궁극적 목표라 언급했다.

 

기억 재배치 현상발견에서 나아가 메커니즘과 역할 규명

기억에 관한 이전 연구에 따르면 학습이 반복되면 일관된 신경세포와 그 세포들의 연결에 강화가 일어나 기억이 향상된다고 알려져 있다. 즉 반복된 기억이 같은 곳에 계속 저장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뇌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실시간으로 관측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에 그간 반복 학습의 결과로 생기는 기억 흔적(memory trace)에 대해서는 추측만 있을 뿐, 정확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과학기술의 혁신적 발전은 기억을 저장하는 뇌 세포를 표지하는 것은 물론 해당 세포들만 활성화 또는 억제시키는 등 조절을 가능케 했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동물의 뇌 안에서 벌어지는 개별 신경 세포 하나하나의 활동을 실시간으로 눈으로 관찰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한 교수 연구팀은 이러한 최첨단 신경과학 기술을 접목하여 기존의 통상적인 관념과 다른 기억 자리 재배치 현상을 제시하고, 그 기작과 역할을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 교수는 기억 저장 위치가 조절되는 메커니즘과 치매 질환에서 기억 배치 현상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살피는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과제라 설명했다.

기억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며 기억 자리 재배치 현상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반복적으로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배우지만 이에 대한 기억은 각각 다른 위치에 저장된다는 점이죠.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여겨 여러 번 실험을 반복해 이러한 결과가 옳다는 실험적 증거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원인을 밝히고자 합니다.”

한 교수는 기억이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기억이 뇌에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간 추상적인 현상처럼 여겨지던 기억의 생물학적 실체를 밝힌다는 점은 그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 교수가 오랫동안 기억에 관한 연구에 몰두해온 이유다. 그는 현대 과학으로도 풀기 어려운 미스터리였던 복잡한 뇌 속 엄청난 양의 기억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찾아가는 중이다.

 

인공지능 활용한 퇴행성 뇌 질환 치료 시스템 개발

4차 산업혁명과 함께 대두되고 있는 인공지능은 의료 기술과의 융합으로 질병 치료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다. 특히 오랫동안 그 해법을 찾지 못하던 여러 질환 퇴치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이러한 기대는 퇴행성 뇌 질환 분야에도 적용된다. 뇌 질환과 관련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한 원인조차 규명되지 않았으며, 약물치료 역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어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있던 뇌 질환 규명과 치료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에 한진희 교수는 기억 엔그램 기작 규명에 대한 연구와 함께 AI(인공지능) 기반 뇌 자극 기술개발을 통한 치매 치료 및 인지기능 향상 연구를 수행해왔다. KAIST 인스티튜트(KI) 산하 바이오 융합연구소(KIB), 헬스사이언스연구소(KIHST), IT융합연구소(KIIT)가 참여한 이 연구는 첨단기술을 활용해 퇴행성 뇌 질환 치료에 도전하는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KI 공동 연구팀과 함께 개발하는 인공지능 조절 뇌 자극 시스템은 신경 신호에 반응해 뇌를 자극한다. 퇴행성 뇌 질환의 징후를 신호로 감지해 뇌파를 조절하거나 신경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해당 기술은 뇌 자극을 통한 퇴행성 뇌 질환 완화 및 치료에 활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화 알고리즘으로 뇌파 이상 징후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또한 증상의 경중에 따라 다양한 자극 방식이 적용되며, 이 과정에도 기계학습을 통해 환자별, 증세별 적정 수준의 자극을 도출한다.

한 교수는 아직은 생쥐를 이용한 동물 실험 및 기술 개발 단계에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뇌에 적용해 퇴행성 뇌 질환을 완전히 치료하는 것이 목표라 설명했다. 또한 퇴행성 뇌 질환뿐 아니라 각종 정신 질환 및 수면 장애 치료, 약물 치료가 효과를 보이지 않는 질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인터뷰 내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간 한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기초연구자

기초과학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한진희 교수는 과학자들이 갖춰야 할 3가지 역량을 강조했다. 첫 번째는 유행을 타지 말고 꾸준히 자신의 연구 분야에 정진하는 것이다. 작은 질문일지라도 끝까지 풀어낸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오랜 시간 끝까지 파고들어 해답을 찾는 것이야말로 기초과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두 번째는 남들이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다. 최근 미디어 등을 통해 새로운 과학 소식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한 교수는 이를 좇거나 파생되는 생각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보고, 여기에 과감히 도전할 때 과학의 저변이 확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세 번째로 한 교수는 기초과학자는 자신만의 꿈과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학자라면 기계적으로 논문을 펼쳐내기보다 라는 질문과 그 해답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올바른 철학과 인성을 바탕으로 꿈이 갖춰질 때에야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는 과학이 탄생할 수 있음을 힘주어 말했다.

기초과학은 인간들의 지적인 호기심과 문화적인 활동의 기반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응용의 목적으로 연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응용과학의 씨앗이 되는 분야입니다. 씨앗이 땅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죠. 저는 기초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끝까지 하나의 주제를 연구하고자 합니다. 견고한 뿌리를 바탕으로 제 이름에 수식어처럼 붙을 수 있는 발견을 하는 것이 과학자로서의 꿈입니다.”

한 교수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꿈을 갖고 있을 것이라며, 이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세대를 거쳐 오랜 시간 연구될 때에야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 역시 선배들에게 과학을 배웠듯 학문의 후속 세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여러 세대를 거쳐 꾸준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에야 탁월한 발견이 나올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는 그다.

기초과학은 국가의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단 시간에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분야기도 하죠.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그는 기초과학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당부하기도 했다. 세계적 연구를 위한 집중적 투자도 중요하지만 저변 확대를 위한 연구 역시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중이 큰 연구에 투자할 때에도 철저한 평가와 냉철한 판단을 토대로 필요한 연구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최근 기초과학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의 지원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과학계는 물론 그에게도 희소식이다. 금번 선정으로 지원을 받게 된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을 필두로 다른 기업체에서도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증가하고 있으며, 정부 역시 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 교수는 기존 연구자 외에도 갓 교수에 임용되는 등 젊은 연구자에 대한 응원이 필요함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들은 창의적인 생각과 도전정신을 갖고 있기에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만큼,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질 때 과학은 또 한 번 발전의 동력을 갖출 수 있다는 해석이다.

끝으로 한 교수는 연구실에서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연구실 학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조언을 남겼다. 가설과 다른 결과를 얻는다면 그에 대한 해석이 있을 뿐이며, 이는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새로운 발견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누구도 알지 못하며, 실패는 그 속에서 또 다른 길을 발견하는 열쇠가 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기억의 비밀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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