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 80대에도 치열한 이 시대의 대표적 지성
이어령 前 문화부 장관 - 80대에도 치열한 이 시대의 대표적 지성
  • 안수정
  • 승인 2015.08.1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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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평론가에서 언론인, 교수, 그리고 문화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해 온 그는 한마디로 놀라운 ‘창조자’다. 그의 글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사실을 뒤집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여든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지적 여정은 쉴 틈 없이 계속되고 있다. 
 
디지로그(디지털 아날로그) 기반의 생명자본주의 시대 도래
ㅣ 이 시대 지성을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몇 해 전 디지로그를 주장했듯, 현시대를 평가한다면?
 
“‘내가 지각은 않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 ‘디지로그’입니다. 당시 디지털이 아날로그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로 발전해야한다고 주장했죠. 이는 모바일, 스마트폰 등을 통해 현실화 됐지요. 스티브 잡스나 구글, 페이스북 등 앞선 상상력이 온·오프라인의 벽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현실과 사이버 세계가 공존하는 시대가 왔어요. 제가 최근 새롭게 던진 화두는 생명자본주의입니다. 리먼 브라더스 쇼크이후 전 세계의 금융·산업자본 시스템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경제전문가들은 사회주의 소련 붕괴 후 자본주의가 엄청난 발전을 할 줄 알았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미국의 반 월가 점령으로 촉발된 금융자본주의 반대 시위 등 오히려 더 큰 몸살을 앓고 있잖아요? 이제 자본주의는 새로운 생명 패러다임으로 바뀌지 않으면 희망은 없습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도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좋은 제도이지만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요. 그러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발전해왔기 때문에 유리그릇처럼 전체시스템이 한 번에 깨질 일은 없을 거예요. 후대에는 우리가 겪었던 물질적 산업금융시스템에 기초한 자본주의와 달리 평화, 생명, 사랑 이러한 가치가 모든 생산 수단과 목적의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를 물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주장하는 생명자본주의입니다." 
 
▷생명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새롭습니다. 의미를 설명해주세요.
 
“생명은 보편적으로 다 쓰는 말이죠. 라이프, 리빙 모두가 관심 갖는 단어죠. 다만 자본주의는 경제학자들이나 정치·경제계에 계신 분들만 주로 쓰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자본은 단순히 돈 같은 물질 개념이 아닙니다. 김연아의 자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실력과 미모가 아닙니까. 스포츠 선수는 다리를, 탤런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신체를 보험에 가입하기도 합니다. 즉 물질화된 자본 말고 인간 자체가 가진 자본을 보자는 뜻 이예요. 어렵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생명 자본을 하고 있어요. 아이를 출산하고 무사히 키우는 것도 생명자본이죠. 저출산 고령화가 왜 일어났겠습니까? 애 낳고 기르는 걸 자본이 아니라며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까 툭하면 ‘집에 가서 애나 봐라’라고 말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기존 경제학에서 GDP만 올라가면 다 되는 줄 알고 이런 생명자본 부분을 제외해 버린 것이 뼈아픈 실책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의료, 문화, 농업 같은 인간의 삶과 의식에 대한 뭔가를 찾아보자는 의미예요. 이미 우리 전통에도 있어요. 품앗이나 계모임이 대표적이죠.” 
 
▷시대를 읽어내는 혜안이 있으신데, 특별히 영감을 얻는 곳이 있으신가요?
 
“제 생각이 적어도 5년, 10년을 앞설 수 있었던 것은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상상력 때문입니다. 50년대 저항문학인 ‘흙속에 저 바람 속에서’는 전통사회에서 어떻게 근대화, 산업화 패러다임으로 바꾸느냐는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 다음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탈산업화와 이념의 벽을 허물기’에 중점을 뒀죠. 우연의 일치인지 베를린 장벽과 함께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지켜봤습니다.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캠페인을 주장하면서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새천년 준비 위원장을 맡았을 때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2000년 1월 1일 새벽 0.2초 차이로 처음 태어난 어린이의 울음소리를 전 세계에 영상메시지로 전달해 ‘미래는 물질에서 생명으로’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이것이 최근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맞물려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주의 주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먼저 세상 떠난 딸 추모 ‘굿나잇 키스’ 펴내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2012년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민아 목사를 추모하는 글을 모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펴냈다. 책은 딸의 출생과 성장 과정, 첫사랑과의 결혼, 실패의 아픔, 투병 이후 영혼의 눈을 뜨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단편 에세이들과 시편 등으로 엮었다. 이 책은 단순한 추모 산문집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위안과 희망의 이야기다. 천국에 있는 딸에게 보낸 ‘우편번호 없는 편지 모음’이라 부를 만한데, 귓속말로 속삭이는 듯한 어조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비디오로 되감듯 선명하게 재생하고 있다. 동시에 생명과 가족의 가치가 변질되고 고령화·저출산 등이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는 오늘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시 성찰하게 함으로써 생명과 가족애라는 주제를 사회적으로, 현실적으로 재조명하게 한다.
 
“처음에는 나에게만 닥쳐온 비극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겪는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딸의 3주기를 맞으면서 여유가 생긴 것일까. 나와 똑같은 슬픔과 고통을 쫓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랬느냐고.”
  
▷마음속에 개켜두었던 글들을 세상 밖으로 내놓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다시는 읽고 싶지도, 공개하고 싶지도 않은 글이에요. 나는 이 아이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 목격한 사람입니다. 자궁(Womb)에서 무덤(Tomb)까지 본 거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그것도 그냥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일부가 태어나 죽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은 아주 희귀합니다. 내가 80년 이상까지 살고 이 아이가 도중에 비운(悲運)에 떠나버렸으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특이한 경험을 통해서 출생과 사망에 관한 고전적인 테마를 말해보고 싶었습니다. 나의 체험이 딸을 잃은 아버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 ‘요즘은 왜인지 자꾸 울음이 난다’는 말을 하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주면 좋겠어요.”
 
▷글에서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기도 한데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딸의 죽음 자체보다 평소에 ‘굿나잇’같이 아주 평범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이 아프게 다가왔어요.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새 잠옷을 자랑하면서 굿나잇 키스를 받고 싶었지만 글쓰기에 몰입한 못난 아버지는 그 짧은 순간, 고개를 한 번 돌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죠. 만일 지금 나에게 그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딱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딸은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겠지요.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 하고 외치면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던지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펴 딸의 가슴을 안을 겁니다. 딸의 키가 천장에 다다를 만큼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딸의 눈, 상기된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할 겁니다.”
 
▷아직도 ‘초보 아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신다면.
 
“이 시대는 ‘아버지 없는 사회(Fatherless Society)’입니다. 어머니와 자식 간은 아무리 사이가 나빠도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관계지만,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달라요. 하나의 문화이자 문명입니다. 어머니와 자식은 의미부여할 필요 없이 확실하지만, 자궁을 갖지 않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성(姓)’을 이어받음으로써 문화적으로 맺어진 관계죠. 아버지의 태도에 따라 더 가까울 수도 있고, 멀 수도 있고, 아예 타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아버지들은 죽을 때까지 ‘초’ 자를 떼지 못하는 초보 운전수일 수밖에 없는 가 봅니다. 아버지들은 딸을 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딸이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말이지요. 얼마나 많은 딸들이 임당수에 빠져 목숨을 잃어야 눈먼 아버지들이 눈을 뜨게 될까요. 그걸 알면 아버지들은 절대로 전쟁 같은 것, 남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 같은 것, 숲을 사막으로 만드는 환경을 파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아버지는 사회공동체에서 권위이자 질서입니다. 요즘은 아버지가 없는 사회에요. 아버지는 분명 살아있으나 여분의 인간 같은 존재로 추락했습니다. 바로 한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존재감과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한 사람의 남편이자 자식을 둔 아버지, 나아가 할아버지인 이어령의 민낯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은 결코 인간의 끝이 아니에요. 오히려 죽음 뒤에 미처 하지 못한 말들과 배움 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로부터 새로운 시작이 열리게 될 거에요. ‘지는 저녁 해는 바로 내일 떠오르는 아침노을의 그 태양 빛’처럼 말예요. 이런 의미에서 ‘굿나잇 키스’는 새로운 아침이 온다는 희망을 품은 인사말입니다.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어요. 나는 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슬픔의 노을을 아침의 노을로 바꾸어버리는 재생과 부활의 힘을 믿는 것이라고요. 남들이 다 놀리더라도, 나는 그 힘이 딸이 말하는 믿음의 힘이고 희망이고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80대에도 식을 줄 모르는 열정
81세의 노학자는 변심을 고백했다. 80세가 되면 살아온 것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요즘 마음이 바뀌었다. “정리는 무슨 정리, 써 놓은 것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잘못된 채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고 했다. 이유는 하나다. 살아있는 동안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서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20세기가 베토벤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모차르트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이젠 비극의 영웅인 베토벤의 고뇌 어린 진지함과 암울함보다는 모차르트의 경쾌함과 천진함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은 땀과 눈물과 고통의 결과입니다. 정말 어렵게, 가난하고 기구하게 살아 음악도 장중하고 가라앉게 만듭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전쟁을 거치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던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목숨 걸고 민주화를 쟁취했으니 저항과 투쟁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즐겁게 하자는 주장입니다. 고뇌하지 않고도 최상의 영혼을 누릴 수 있다, 너무 안일한 이지고잉이 아니라 평화롭고 재미있는 일을 신명나게 하자는 뜻이죠. 그래야 진정한 창의성,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스티브 잡스가 왜 부유층이 많은 스탠퍼드대학의 졸업식에서 ‘Stay foolish, Stay Hungry’란 말을 했을까요. 바보같이, 배고프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을 만큼 무모한 일을 하고,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신나게 도전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를 위한 도전이 아니라 모차르트처럼 천진한 도전을 할 때 창조적이 됩니다.”
 
▷선생님의 숱한 업적과 아이디어를 보고 천재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차르트도 천재인데요?
 
“어릴 땐 저도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웃음)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깨치고 중학 때 프로이트를 읽었으니 선생님들의 말씀이 다 시시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천재는 글 하나를 써도 달라요. 이상의 <권태>를 비롯한 시를 읽으면 어떻게 그런 비유를 할까, 타고난 천재라는 감탄사가 나옵니다. 전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어요. 다만 지적 호기심 등의 목마름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 목마름이 창조의 비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천재는 대부분 요절합니다. 저는 서른을 넘고부터 천재가 아님을 알았죠. 점점 나이 들면서 오래 산 사람 가운데 천재를 찾아보니 괴테가 있더군요. 괴테도 대단히 박식했지만 노력형입니다. 그래서 감히 대기만성형의 괴테로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직 할 때. 당시 고별사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슘페터의 말을 인용하셨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30대에 이미 두 권의 명저를 내어 유명인사가 되었던 슘페터는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했죠. ‘유럽 미녀들 사이의 최고 연인, 유럽 최고의 승마인, 그 다음으로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로 기억되고 싶다’고요. 그러나 66세로 그가 하버드대서 마지막 강의를 할 무렵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은 아주 달랐습니다. ‘나는 대여섯 명의 우수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선생으로 남고 싶다. 나도 이제는 책이나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가 된 것이다.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책이나 이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팔순을 넘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훌륭한 학자도 아니고, 이상적인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습니다. 문단과 학계에서도 외톨이인 편협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신화학자 이윤기 선생처럼 제 글이나 시를 외는 이들, 혹은 거리에서도 제가 쓴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주는 분들 덕분에 행복합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글로 영향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말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현실이라는 건, 오늘이라는 건 참 엄격하고 고단하고 에누리가 없습니다. 과거는 변명할 여지가 있고, 미래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산다는 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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